한로 지나며 : 정일근 그대 지금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돌아오는 길에 경주 남산이 물었다 제 몸 속에서 피운 붉은 꽃잎마다 돋아나는 결별의 찬 눈물을 보며 산은 가을산은 달이 서쪽을 돌아오는 한낮 동안 저 홀로 참담했을 것이다. 때로는 산도, 사람의 마음에도 쓸쓸함의 물기가 묻어나는 날이 있는 것이다 그 물기에 젖어 침묵하고 싶은 날이 있는 것이다 풀들이 마르기 시작하는 신라 왕릉에서 가을의 발목이 젖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저물어도 돌아갈 곳 없는 저녁 바람에 야윈 비비추들이 몸 비비며 소리 없이 우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내 존재의 쓸쓸함에 참을 수 없어 찬 이슬이 내리는 어둠 속에서 찬 술 한 잔 마시고 왔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마음의 사립문을 걸어 닫았다 한로 지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하는 일 뿐이다 마르면서 생각 깊어지는 풀들의 휘어진 등뼈마다 맑고 둥근 이슬이 맺히듯이 내 영혼의 혀에 사유의 영롱한 차가움이 돋아날 때까지 이제는 침묵하며 기다리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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