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강을 보면 안다, 저기 봐라, 긴뿌리

골짜기 깊숙이 감춰놓고

줄기째,  줄기로만 꿈틀거려 여기 와 닿는,

 

내리는 비도 주룩주룩 내리면 하늘의 실뿌리 같고

미루나무 숲길 듬성성한 저 강가 마을들

세상의 유서 깊은 곁뿌리지만

 

근본 모르는 망종들처럼

우르르 쿠당탕 한밤의 집중호우 몰려들어

열댓 가구 옹기종기 마을 하나 깡그리

부숴놓고 떠나간 자리, 막돼먹은 저 홍수가

절개지의 사태 멋대로 끌고와

문전옥답까지 온통 자갈밭으로 갈아엎은 건

순리도 치수도 모르는 어느 후레자식,

산의 잔뿌리 마구 잘라낸 난개발 탓이리.

 

호호, 허물어진 동구 앞 시멘트 다리 난간에 걸려서

흘러가지도 일어서지도 못해 길게 드러누운 저것,

고향의 길동무, 늙은 느티나무가 아니라

깊디 깊었던 우리들 마음의 뿌리인 것을!

 

(제 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p49-50 펴낸곳 중앙M&B)

 

 

 

빈 그릇이 되기 위하여[정호승]
 
 

빈 그릇이 되기 위하여 / 정호승


빈 그릇이 빈 그릇으로만 있으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우고 비웠다가 다시 채우고 비워야 빈 그릇이다
빈 그릇이 늘 빈그릇으로만 있는 것은
겸손도 아름다움도 거룩함도 아니다
빈 그릇이 빈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채울 줄 알아야 한다
바람이든 구름이든 밥이든 먼저 채워야 한다
채워진 것을 남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비워져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채울 줄 모르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울 줄 모르는 빈 그릇은 비울 줄도 모른다
당신이 내게 늘 빈 그릇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머너 내 빈 그릇을 채워 남을 배고프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채워야 비울 수 있고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므로
채울 것이 없으면 다시 빈 그릇이 될 수 없으므로
늘 빈 그릇으로만 있는 빈 그릇은 빈 그릇이 아니므로
나는 요즘 추운 골목 밖에 나가 내가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박방희시인으로 부터 상을 받은 어르신과 함께  시낭송대회에서 기념촬영

 

감나무는 추억으로 환하다  / 박방희

 

 

눈 내리는 저녁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아련한 기억 속으로 먼 가지를 뻗으며

외양간 어미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있다

지난가을 홍시를 단 빈 꼭지의 기억으로

가지마다 발그레한 추억의 등이 켜지고

마당가 늙은 감나무는 꿈꾸듯 환해진다

 

 

 

 

 

 

박방희시인으로 부터 상을 받은 어르신과 함께  시낭송대회에서 기념촬영

 

감나무는 추억으로 환하다  / 박방희

 

 

눈 내리는 저녁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아련한 기억 속으로 먼 가지를 뻗으며

외양간 어미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있다

지난가을 홍시를 단 빈 꼭지의 기억으로

가지마다 발그레한 추억의 등이 켜지고

마당가 늙은 감나무는 꿈꾸듯 환해진다

 

 

 

 

 

 

백내(白川)/박방희

어느 해 여름 장마에 큰 물이 지고백내 황톳물이 학교 가는 길을 가로막아 그 도도한 흐름 앞에 망연히 서 있을 때,

 함께 건너자며 손 내밀었지요.

가늘고 긴 팔뚝으로 파르라니 또 다른 강이 흐르는데

그 손 잡고 둥둥 허리까지 차오는 물 건넜지요.

물 다 건너면 잡은 손 놓아야 된다는 생각에

아득히 손잡고 떠내려갔으면 했지요

우리 20리 등하굣길 둑에 핀 두 떨기 꽃처럼 한정 없이 떠내려가

먼먼 바다에 가 닿아도 좋으리라 생각했지요.

젖은 교복치마 내리며 임은 내게 미소 지어 보이곤 돌아서 갔지요.

그때 우리가 건넌 게 그저 백내의 냇물뿐 이었는지,

우리 인연의 한 굽이를 건너거나

이승의 한 생을 건넌 것은 아니었는지,

그 여름 손잡고 내 건너던 때 생각하며 멍하니 오래 서 있곤 하지요.

새하얀 팔뚝에 흐르던 파란 정맥의 강이 내게로 흘러 들어와

내 몸은 언제나 임 있는 쪽으로 열리는데,

 

임께선 언제 돌아와 이승의 못다 건넌 내마저 건너려는지,

혼자서는 못 가 닿을 피안으로

임 손잡고 건너 갈 꿈꾸며

아직도 까까머리 중학생은 그 냇가에 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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