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가을
이 시집 ‘시인의 말’에 나오는
‘2010년 1월 수월산방에서’의
그 ‘수월봉’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
이 시집을 받은 것이
그 해 12월 5일이니,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다시 시집을 펼치다 본즉,
서명에 ‘꽃을 품고 살면/ 꽃이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시집 뒷면 추천글에는
고은 선생이 ‘웬 절창이 이리도 많노!’라 감동했다.
‘시인의 말’을 본즉,
‘어머니 장공재 여사께 바친다.’고 적었는데,
시집 제2부는 모두 절절한 사모곡이고,
시편 곳곳에서 어머님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이 가을, 시집에서 몇 편의 시를 옮겨
요즘 한창 익어가는 감과 같이 싣는다.
♧ 불온한 내력
땡감 덩굴이 많은 숲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갈퀴나무를 하러 자주 왔던 곳 무덤만 즐비하다 자벌레 한 마리 가던 길 끝에서 머뭇거린다 나는 여기서 끝났을까 몸을 구부리는 벌레의 물음표, 나는 물것의 사상을 모른다
계곡은 낮아지며 깊어진다 나는 송피를 먹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구루마를 타 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나의 세계관 가을이여 기억의 힘으로 타오르는 붉은 잎새들이여 언제나 현실은 괴롭다 소나무 뿌리가 박힌 버려진 무덤에서 누군가가 나올 것만 같다 신화가 된 선조들 문득 낯선 사내 하나 말을 타고 나오면 아으 다롱디리 노래를 할까
해가 지더라도 저 석양의 이빨에 한 사흘 물렸으면
점占으로 써 내리는 가을 저문 숲에서
나는 너의 인생에 의무가 없다 아들아
고집불통의 조상들은 끝까지 절을 받는다
♧ 꽃섬
먼 데 섬은 다 먹색이다
들어가면 꽃섬이다
♧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 쥐엄나무 그늘에 앉은 아버지
아버지는 저수지 옆 사장에서
새하얀 모시옷에 청춘을 풀 먹였네
청산리 벽계수야 노래하였네
저수지에 푸르게 노랫소리 출렁거렸네
어머니는 모를 심었지만
아버지는 피를 뽑지 않았네
수이 감을 자랑 마라 늘어지는 가락에
우리들 유년은 오뉴월 엿처럼 늘어져
허기도 반찬이 되지 못했네
코스모스 향기에 목이 감긴 누이는
저수지에 빠졌네
물에 빠진 누이는 꽃향기로 날아가고
물을 뺀 저수지 흙탕물 든 모시옷
변한 건 없었네 장독대 한쪽 비었을 뿐
사람들 미친개를 저수지로 몰아갈 때
수이 간 누이는 어버지를 울렸네
어머니는 피밭에 나락처럼 한숨 쉬고
세월은 해와 함께 비탈로만 달려갔네
제 몸을 쥐어짜 꿀을 만든 쥐엄나무
그 나무그늘에 앉은 아버지
노래하지 않았네
자식들 몸 팔려 간 신작로 바라보며
장독대 항아리처럼 검은 물 고였네
♧ 달몸살
제 몸의 중심에 벌레들을 기르는 귀목나무 아래에서
아프다는 것이 축복임을 안다
앓는다는 것은 내 안에 누군가를 키우고 있다는 것
아픈 몸은 홀몸이 아니라는 것
잎 돋는 귀목나무 바람과 노는 걸 보며 알았다
순과 꽃 우거진 봄 언덕은 팔만대장경
오래 동무한 병과 함께 누워
묵언의 말씀들 그 향에 취한 채
달몸살을 앓는다는 한 스승을 생각했다
어느새 바닷물이 몸으로 들고 나서
바다와 함께 화를 내고 바다와 함께 쓸쓸해진다는 그
그는 나보다 오래 앓아서 우주와 한 호흡이 되었으리라
내 안에 이는 바람에 툭 하고 잎이 돋는다
누군가 나에게 병에 대해 묻는다면
앓으며 살아가며 한 호흡이 되는 것이라고
죽을 만큼 아프면서 끝내 사랑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 내게 사랑이 있다면
아득히 멀리 휘어진 길 같은 것이라고
띠풀 사이 논둑길 지나
장끼 소리 흘러내리는 솔숲 아래
시리게 피어 겨운 쑥부쟁이꽃 같은 것이라고
또랑을 건너면 집이 나오고 집은 외딴집 허물어져가는
논일을 마치고 오는 노인 부부가
부끄러이 등 뒤에서 손을 맞잡고
도란거리며 새립으로 들어서는
적막한 오후 같은 것이라고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시선 311,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