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①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②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③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④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⑤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⑥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⑦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⑧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⑨
강가에 나온 아이⑩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⑪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⑫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⑬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⑭
-<개벽(開闢)>(1926)
♣시구 풀이 도우미
① ‘들’은 국토를 대유하고 있다.
② 지평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화자의 이상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③ 침묵하는 조국 현실에 대한 저항적 심경이 표출되고 있다.
④ ‘아름다운 나의 국토가 나를 이곳을 이끈 것 같구나.’
⑤ 원관념은 도랑물이 흐르는 소리이다.
⑥ ‘서두르지 마라’의 대구 사투리.
⑦ 동백기름으로 곱게 머리를 빗은 우리 농민의 모습을 상징한다.
⑧ 모성(母性)으로 비유된 국토.
⑨ 강한 노동에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⑩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⑪ ‘봄 내음’을 의미한다.
⑫ 기쁨과 슬픔의 시각적 형상화(역설법)
⑬ 정서적 불균형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⑭ 국토를 빼앗겨 ‘참다운 삶의 희망’마저 빼앗기게 된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