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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이야기

행복한복지사 2015. 8. 18. 13:42

9대 진사 12대 만석군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

 

 

(마지막 최부자 문파 최 준(자) 할아버지 막내손자의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최 탁 이라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듣는 분에 따라 집안자랑 처럼 들릴 수 있기에 조심스럽네요. 그러나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 했고, 광복 후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바친 조부님의 업적을 자손 된 도리로써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3대만 이어진다는 부자집이 어떻게 12대를 이어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조상님들의 위업, 철학, 선구자적 기업가정신을 말씀드리고,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 해보겠습니다.

 

최탁

노비의 제사를 모시는 양반

 

저희 집(본적)은 경북 경주시 교동 69번지입니다. 교동은 향교가 있는 곳을 칭합니다. 12대의 시초는 1대이신 정무공 최 진(자)립(자) 장군 이십니다. 이분은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는 왕(인조)을 구하고자 의병을 모아 경상도에서 싸우시다가 지금의 광주에서 전사 하십니다. 정무공 할아버지는 “불천위” 로 모십니다. 불천위는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4대 이후에 사당에 모시는 것과는 달리 임금님이 하사하신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이때 같이 전사한 노비(옥동,기별)도 함께 모십니다. 역사상 노비의 제사를 모시는 양반집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큰 부자는 아니었고 지방의 천석 정도의 부자 였습니다.

 

3대 이신 최 국(자)선(자) 할아버지께서 이전의 벼농사법인 직파법이 아닌 이앙법을 개발하시고, 엄청난 부를 모으게 됩니다. 만석군 부의 시작입니다. 만석의 규모를 말씀 드리면 1석은 1섬 이라고들 하는데, 현재의 계량형으로 80kg 입니다. 만석은 80만kg이 됩니다. 20kg자리로 4만포대 정도입니다. 지금 화폐기준으로 보면 약 30억 정도지만 그 시대에는 엄청난 부자, 즉 요즘 기준으로는 재벌급입니다. 당시의 경제의 기준은 백미였는데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1년 소출이 만석이면, 매년 그정도의 수입이 대대로 있었다는 것이지요. 만석은 소작료를 제하고 난 소출의 규모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지주와 소작농과의 소출비율이 8:2였습니다. 소작농이 소출의 20%를 가져 가는 구조였는데 저희는 5:5의 비율로 나누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지면 땅을 팔게 됩니다. 딸 가진 부모는 자식도 팝니다. 그래서 이왕 땅을 팔면 최부자집에서 사주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땅을 팔고 소작으로 들어가길 원했지요.

 

집안의 가훈과 육연

 

첫째,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마라.

당쟁과 권력싸움에서 비켜 가라는 말입니다. 벼슬이 높을수록 감옥은 가까워 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싸움에 하루아침에 사대부의 자리에서 유배를 가거나 사양을 받고 남은 가솔은 남의 집 종이나 관기로 팔려가는 예가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옛날 양반의 기준은 3대에 한 번 이상 진사시를 통과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초시(진시)라고 하는데 합격 하면 백패를 받습니다. 향시라고도 합니다. 진사 또는 생원이 됩니다. 양반신분증인 것입니다. 지방의 하급관리가 되는 것입니다. 양반의 지위는 유지를 하되 벼슬이나 권력을 탐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둘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관개구로나 농법이 발달되지 않아 일년소출은 오로지 하늘에 달렸습니다. 민란도 많았고 따라서 굶어 죽는 사람이 무척 많을 때입니다. 흉년에는 궁핍한 농부가 헐값에 땅을 내놓고 무척 싼 값에 살 수가 있습니다. 이 때 땅을 산다는 것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의 방정식입니다. 이를 금했다는 말이지요. 쌀한됫막이 논이라고 굶어죽기 전 내 땅이 쌀 한되에 넘어갑니다. 이것은 두고 두고 원망과 질시를 받게 됩니다. 요즘의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공정한 사회정의를 실천하라는 뜻과 일맥 상통 합니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제가 어릴적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독상과 놋그릇 반상이 있엇고 보관 창고가 별도로 있었습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외부와 소통 하고 전국 각지의 정보교류와 우호적인 여론조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 례로 “한수 이남에 최고 부자는 경주 최부자” 란 말이 있는데 사실 저희집보다 규모가 더 큰 부자도 있었습니다. 소문이 좋게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전국에는 만석군이 12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넷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부자(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는 경제적, 윤리적, 법적, 박애적 책임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가장 높은 단계의 사회적 책임을 달성코자 한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민란이 많았습니다. 그 민란에 저희 집이 무사 한 것은 농민들, 그리고 화적떼들도 최부자집은 건들면 안된다 그집은 보호해야 한다 였습니다. 동학혁명시절에 건재했던 유일한 부자가 경주 최부자집, 저희집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말씀이 육훈중에 으뜸이라 생각 합니다. 버금은 나머지 오훈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의 우리사회 전체에 필요한 덕목 이기도 합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의 차용증서나 집, 땅문서도 불 태우기까지 했습니다. 만석군의 초창기에는 화적떼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사람들이 소작인이나 농민이었고 그들의 어려운 참상을 본후 차용증이나 각종 담보서류를 소각하고 더 이상 묻지를 않았습니다.

 

 

 

다섯째, 재산은 만석 이상 하지 마라.

더 많은 재물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부의 쏠림을 막자는 것입니다. 또한 수확량이 많으면 만석의 규모를 지키기 위해 소작의 비율을 높이게 되니 소작농의 경우는 소작수입이 늘어나게 됩니다. 현대 부자의 기준에는 미친소리와 다름 없지만, 이 말씀은 내 가솔도 중요 하지만 남도 배려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조상의 유훈이나 집안의 가훈은 누구도 거역 할 수 없는 법 보다 우선하는 가치이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였습니다.

 

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무명옷은 서민의 옷입니다. 실제로 3년이 지나도 계속 입어야 했습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양반이지만 가난한 서민의 심정을 이해해야 그들의 지지를 얻고 신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으로는 명품에 뜻을 두지 마라입니다. 옛말에 부자는 3대를 못간다 하였습니다. 절약과 검소함으로 축척한 부를 후대에서 낭비와 허영으로 탕진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은 혜택 받은 자의 책임, 가진자의 솔선수범

 

 

경주 최부자의 명성은 정무공 할아버지부터 시작되어 10대에 걸쳤지만 근대에 들어 빈민구제와 독립운동, 교육사업 등 자손에게 유산을 주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로마천년이 지탱될수 있도록 받쳐준 철학이 “혜택 받은 자의 책임” 가진 자의 솔선수범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말의 예시로 저의 조부님이 처음 거론 된 것으로 압니다. 조부님의 업적은 첫째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민족산업에 투자 했던일이고 다음은 해방 후 민족교육에 사람과 재산을 모두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부님은 백산 안희제 선생님과 “백산상회”를 설립, 조부님이 군자금 마련과 전달을 했는데 총규모가 지금화폐로 8조라고 합니다. 이것은 부자의 몰락을 처음부터 예견하고 시작 하신 것입니다. 동서고금에도 이런 사례는 희귀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군자금의 운반은 주로 백산선생께서 하셨습니다. 해방후 백범선생과 경교장에서 만났을 때 조부님의 송금금액이 한푼도 어김없음을 알고 절반이라도 갔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엇던지라 “백산.. 나를 용서하게“하며 백산선생묘가 있는 의령쪽으로 큰절을 하셨습니다. 그 외 여러 가지의 일화가 많습니다. 군자금 마련으로 집안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1921년 백산상회는 망하고 뒤이어 집안의 모든 재산은 식산은행과 경상은행에서 모든 재산을 압류합니다. 백산상회는 주목적이 군자금송금이 주목적이었고 대출이나 은행거래에서는 사장이신 조부님의 보증을 요구하게되고 자연이 집안은 파산의 위기가 닥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와 식산은행장 “아리가”는 최부자집을 망하게 하면 민란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 부도유예조치를 취합니다.

 

이 부분은 논란이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그당시 일제는 “내선일체” 정책이었고 최씨집안을 망하게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식산은행장이 일본의 호족집안 출신이었고 조선총독 사이또 와의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이또는 저희집의 명성을 듣고 여러번 방문도 하고 가주인 법주와 사인지라는 김치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중 조부님과 친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던 중 해방이 되고, 채권의 주체가 없어지게 되며 집안의 재산은 상당부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도우신 겁니다. 조부님은 독립운동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사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더불어 교육자로써 대구대학이라는 민립대학을 설립했고 학교는 주인이 학교 자체이지 설립자 개인 소유물일 수 없다는 조부님의 설립정신은 군사정권 시절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저희 집안의 가문경영이 근대 산업자본으로 진화하지 못한 것은 후손으로써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약없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에 전재산을 기부하여 부의 마지막이 명예롭게 마무리된 것은 조부님의 숭고하신 뜻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금 경주의 집까지도 영남대학에 출연하셨습니다. 만약 그많은 재산을 우리 자손에게 물려 주셨으면.. 어린 나이에 재산을 그냥 물려 받았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또한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새로운 부의 사회적 책임, 기업사회공헌

 

이 시대의 부자인 기업의 사회공헌은 단순기부에서부터 “참여”라는 개념의 임직원들의 자원봉사활동으로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부문화나, 사회공헌의 참여자가 늘어가는 것은 기업이나 일반 대중의 사회적 책임이 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든든한 기둥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국가와 사회는 안정되고  비약적 발전을 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자가 좋은 일 하는 것을 더 소문내어, 부자라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공헌과 기부를 많이 하는 문화가 서야 합니다. 부자의 최대 과제는 빈자에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한다는데 누가 뭐래? 라는 천민자본주의적 사고가 사치로 이어지고 그것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것에 기준점을 둡니다. 남들이 다하니 나도 한다는 집단주의적 사고지요.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은데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고 나눌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 집안의 이야기에서 참 부자에 대한 생각을 함께 해보시면 어떨까요? 큰 부자는 아니지만 최소한 마음의 부자가 되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보시나 기부는 자신과 이웃을 넉넉하고 평화롭게 하며 나자신을 성취하는것 입니다. 기독교 에서는 “Caritas” 기독교적 사랑을 이웃에게 베푼다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덕목 이라 생각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조부님의 조국과 민족의 위한 정신은 100년이 지난 현 시대에 새로이 조명 되는 이유는 분명 합니다. 현재 이시대의 화두인 상생과 경제민주화도 경주 최부자의 청렴한 부의경영 에서 해법을 도출할 수 있고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과 실천윤리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가 있었기에 존재하고 지금의 나, 우리, 가족, 국가가 있기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미래를 발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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